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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25|11min read|102 views|❤️ 3|#etc

달을 보는 사람, 6펜스를 줍는 사람 — 『달과 6펜스』

『달과 6펜스』를 네 번 읽었다. 20대 초반엔 착한 척하며 버티는 스트로브가 나 같아서 싫었고, 지금은 그 둘을 한 발짝 떨어져서 보는 화자 쪽에 가까워졌다. 결론은 단순하다. 달을 좇는 삶도, 6펜스를 줍는 삶도,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삶도 다 가치 있다.

TL;DR

『달과 6펜스』를 네 번 읽었다. 20대 초반엔 착한 척하며 버티는 스트로브가 나 같아서 싫었고, 지금은 그 둘을 한 발짝 떨어져서 보는 화자 쪽에 가까워졌다. 결론은 단순하다. 달을 좇는 삶도, 6펜스를 줍는 삶도,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삶도 다 가치 있다.

Sangwoo Yang

Sangwoo Yang

@IGhost-P

0. 인스타에 갑자기 떴던 책

이 책을 처음 읽은 건 20대 초반, 좀 이상한 타이밍이었다.

내가 여태 사람 대해 온 방식이 틀린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처음 들었을 때. 그러니까 배려하고, 예의 지키고, 운동하고 공부하고 열심히 사는 게, 사실은 그냥 '좋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노력'인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을 때. 하필 그때 인스타에 갑자기 『달과 6펜스』가 떴다. 공감되는 문장이 캡처돼 있었고, 궁금해서 샀다.

그게 1회독. 그 뒤로 두 번을 더 읽었고, 이번에 힛치에서 네 번째로 만났다. 근데 이번엔 교환독서 시즌이랑 겹쳐서 책은 그냥 들고만 갔다.


1. 이런 책이다

런던의 증권 중개인 찰스 스트릭랜드. 마흔 살, 아내와 애 둘, 남부럽지 않은 중산층 가정. 이 사람이 어느 날 쪽지 한 장 남기고 파리로 사라진다. 다들 여자 문제라고 생각한다. 화자가 파리까지 쫓아가서 물어보니까 돌아온 대답이 이거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그리고 이어서.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나오는 게 중요하지."

스트릭랜드는 그림을 배운 적도 없다. 재능이 있는지도 모른다. 근데 그린다. 굶으면서, 빌붙으면서, 사람 망가뜨리면서 그린다. 파리에서는 자기를 유일하게 알아봐 준 화가 스트로브 집에 얹혀살다가 그 집 아내 블란치랑 눈이 맞고, 블란치가 자살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한다. 결국 타히티까지 흘러가서 원주민 여자 아타랑 살면서 그림 그리다가 나병에 걸려 눈이 멀고, 죽기 직전 오두막 벽에 걸작을 완성한 다음 그걸 통째로 태워 달라고 유언을 남긴다.

모델은 폴 고갱. 실제로 증권 중개인이었고, 가족 버리고, 타히티 갔다. 서머싯 몸은 고갱의 삶을 빌려와서 질문 하나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사람이 욕망 하나만을 위해 나머지를 다 버리면, 그 삶은 뭐가 되는가.

서머싯 몸
서머싯 몸

서머싯 몸, 1934년. 칼 밴 벡턴 촬영. 『달과 6펜스』는 1919년, 그가 마흔다섯 살 때 나왔다. (퍼블릭 도메인, Wikimedia Commons)

제목의 '달'은 닿을 수 없는 이상, '6펜스'는 땅바닥에 떨어진 동전, 그러니까 현실이다. 달 쳐다보느라 발밑의 6펜스를 놓치는 사람과, 6펜스 줍느라 달을 한 번도 안 올려다보는 사람. 이 책엔 이 두 종류의 인간이 나온다.

근데 나는 이 책을 읽을 때마다 그 둘 사이에 끼어 있는 세 번째 사람이 자꾸 보인다. 스트로브다.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폴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98. 고갱이 타히티에서 자살을 결심하고 그린 유언 같은 그림. 소설 속 벽화의 원형으로 자주 얘기된다. (퍼블릭 도메인, Wikimedia Commons)


2. 나는 스트로브였다

더크 스트로브. 네덜란드 출신 삼류 화가. 그림은 진짜 못 그리는데 남의 그림 알아보는 눈은 소설 속 누구보다 정확한 사람. 뚱뚱하고, 우스꽝스럽고, 모두한테 놀림받으면서도 모두한테 친절한 사람. 스트릭랜드가 죽어 가니까 아내가 절대 안 된다는데도 집에 데려와서 간호하고, 그 아내를 스트릭랜드한테 뺏기고, 아내가 죽은 뒤에도 스트릭랜드 찾아가서 그림 한 점만 달라고 하는 사람.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 사람이 싫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를 투영했으니까.

그때 나는 을의 연애를 하고 있었다. 완전히 버려질까 두려워서, 힘들어도 좋은 척, 싫어도 착한 척. 머리로는 연애에서 우선순위가 늘 나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내가 열심히 안 하면 끝날 연애'라고 느끼는 순간부터는 나를 희생해서라도 이어 가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 시기에 전 여자친구한테 '착한 아이 증후군'이라는 말을 들었다.

처음엔 좀 억울했다. 나는 내가 진짜 좋아서 그러는 건데. 열심히 사는 내 모습이 좋아서 그러는 건데 왜 그걸 증후군이라고 하는 걸까.

그 상태로 책을 펼쳤고, 41장에서 멈췄다. 블란치가 스트로브랑 어떻게 결혼하게 됐는지 듣고 화자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스트릭랜드가 툭 끼어들어서 하는 말.

"여자는 자기에게 해를 끼친 남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 자기를 위해 희생한 남자는 결코 용서하지 못하지."
(A woman can forgive a man for the harm he does her, but she can never forgive him for the sacrifices he makes on her account. — 41장)

블란치는 로마 어느 귀족 집 가정교사였다가 그 집 아들한테 버림받고, 임신한 채로 자살 시도를 했고, 그걸 스트로브가 발견해서 결혼했다. 스트로브는 블란치의 구원자였다. 근데 바로 그래서 블란치는 스트로브를 사랑할 수 없었다. 빚진 사람은 빚쟁이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 문장이 그냥 박혔다. 그리고 결정타는 블란치랑 스트릭랜드가 불륜을 저질렀을 때 스트로브가 보이는 반응이었다. 화를 안 낸다. 따지지도 않는다. "둘이 행복하게 살아, 집은 너희가 써, 내가 나갈게"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는 듯이 군다. 문제는 명백하게 불륜인데, 그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리지를 않고 자기가 더 착해지는 쪽으로 가 버린다.

그 장면이 싫었다. 너무 정확하게 나였어서.


3. 스트릭랜드는 왜 미워할 수가 없을까

고갱, 후광과 뱀이 있는 자화상
고갱, 후광과 뱀이 있는 자화상

폴 고갱, 〈후광과 뱀이 있는 자화상〉, 1889. 머리 위엔 성자의 후광, 손가락 사이엔 유혹의 뱀. 고갱이 스스로 그린 자기 모습이 딱 이렇다. 성자이면서 악마. 너무 싫은데 미워할 수 없는 사람. (퍼블릭 도메인, 워싱턴 국립미술관 소장, Wikimedia Commons)

반대로 스트릭랜드는, 너무너무 싫은데 미워할 수가 없었다.

이게 좀 이상한 거다. 스트로브보다 더 나쁜 인간인데, 책을 덮고 나면 미움이 남는 쪽은 스트릭랜드가 아니라 스트로브다. 저 사람은 저렇게 행동해도 다들 좋아하는데, 나랑 비슷한 스트로브는 저렇게까지 했는데 나가리가 되는 걸 보면서 되게 슬펐다. 근데 왜 스트릭랜드는 안 미울까.

세 번 읽고 내린 답은 이거다. 스트릭랜드는 남한테 바라는 게 진짜 하나도 없다. 돈도, 사랑도, 인정도. 그러니까 아쉬울 게 없고, 아쉬울 게 없으니까 솔직할 수 있다. 똑같이 말해도 밉지 않게 솔직한 사람이 가끔 있는데, 그게 늘 신기했다. 비밀이 여기 있었다. 바라는 게 없는 사람의 말은 상대를 찌르지 않는다. 그냥 통과한다. 듣는 사람도 그걸 느낀다.

스트릭랜드가 화자를 유독 좋아하는데, 모임에서 그 이유가 "화자는 비위를 안 맞추니까"로 정리됐다. 매달리는 블란치는 싫어하고, "나병 걸려도 난 여기 있겠다"는 아타는 좋아한다. 스트릭랜드가 사람을 고르는 기준은 딱 하나다. 나한테 뭘 바라지 않을 것.

고갱, 해변의 타히티 여인들
고갱, 해변의 타히티 여인들

폴 고갱, 〈해변의 타히티 여인들〉, 1891. 고갱이 처음 타히티에 도착한 해에 그린 그림. 스트릭랜드가 마지막에 닿는 곳의 공기가 이렇다. (퍼블릭 도메인, 오르세 미술관 소장, Wikimedia Commons)

예전의 나였으면 스트릭랜드 옆에서 스트로브처럼 굴었을 거다. 근데 지금은 화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 옆에 스트릭랜드가 있어서 "뭐 어쩌라고" 하면, 나도 "그래, 알아서 해" 할 것 같다. 나랑 관련 없는 거에 딱히 관심이 없어서. 그래서 세 번째 읽을 땐 스트릭랜드가 조금 덜 싫었다.

걸작을 태운 이유는 모임에서 해석이 갈렸다. 자신이 없어서, 미완성이라서, 심지어 그림값 올리려는 바이럴이라는 음모론까지 나왔다. 나는 완성설이다. 그 벽화가 스트릭랜드가 평생 바라본 달이었고, 달에 닿았으면 그 뒤에 그걸 남기든 태우든 사실 상관없다. 남겨서 뭐 하나. 남한테 바라는 게 없는 사람인데. 그림을 남긴다는 건 결국 남의 눈을 의식한다는 거다.

아투오나, 메종 뒤 주이르
아투오나, 메종 뒤 주이르

마르키즈 제도 아투오나에 복원된 고갱의 마지막 집 '메종 뒤 주이르(쾌락의 집)'. 고갱은 1903년 이 집에서 죽었다. 소설 속 스트릭랜드는 타히티 오두막 벽에 걸작을 그리고, 그 걸작은 유언대로 집과 함께 불태워진다. (사진: Remi Jouan, CC BY-SA 3.0, Wikimedia Commons)


4.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그리고 내가 빠졌던 함정

이건 좀 길게 풀어 보고 싶다. 내 생각이 바뀐 게 사실 니체랑 쇼펜하우어 덕분인 것 같아서.

아폴로 벨베데레
아폴로 벨베데레

〈벨베데레의 아폴론〉, 바티칸 미술관. 질서, 비례, 절제, 완성된 형태. (퍼블릭 도메인, Wikimedia Commons)

티치아노,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티치아노,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티치아노,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1520–23. 바쿠스(디오니소스)가 마차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도취, 과잉, 경계가 무너지는 쪽. (퍼블릭 도메인, Wikimedia Commons)

니체는 첫 책 『비극의 탄생』(1872)에서 그리스 예술을 두 신의 이름으로 나눈다.

아폴론적인 것은 꿈과 형상의 세계. 질서, 비례, 절제, 명확한 윤곽. 조각이랑 건축이 여기 속한다. 핵심은 '개별화의 원리'인데, 쉽게 말하면 나는 나고 너는 너라는 경계를 지키는 힘이다. 사회의 규칙, 법, 예의, 역할. 아폴론적 인간은 그 경계 안에서 뭔가를 만든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도취의 세계. 술, 음악, 춤, 축제. 개별화의 원리가 무너지고 나랑 세계의 경계가 녹는다. 규칙보다 본성이 먼저고, 형식보다 힘이 먼저. 디오니소스적 인간은 경계를 지키는 게 아니라 깨면서 뭔가를 만든다.

니체는 이 생각의 뿌리를 쇼펜하우어한테서 가져왔다. 쇼펜하우어는 세계의 본질이 이성이 아니라 '의지'라고 봤다. 이유도 목적도 없이 그냥 살려고 하고, 원하고, 밀어붙이는 맹목적인 힘. 우리가 보는 세상은 그 의지가 겉으로 드러난 '표상'일 뿐이라는 거다.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쥘 룬테쉬츠의 습작, 1856년경. 니체는 스물한 살 때 라이프치히의 헌책방에서 그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집어 들고 그대로 빠져들었다. (퍼블릭 도메인, 슈테델 미술관 소장, Wikimedia Commons)

이 틀로 스트릭랜드를 보면 다 설명이 된다. 이 사람은 그냥 의지 그 자체다. "그리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말은 이유가 아니라 증상이다. 왜 그리냐고 물어도 답을 못 한다. 재채기하는 사람한테 왜 재채기하냐고 묻는 거랑 같다. 가족, 명예, 돈, 심지어 그림을 남기는 것까지 전부 '표상'이고, 그리는 행위 하나만 '의지'다. 디오니소스적 인간의 끝판왕. 모임에서 "이 사람 본성은 그림을 '그린다'지 '남긴다'가 아니다, 그래서 태웠다"는 말이 나왔을 때 바로 수긍이 됐던 이유다.

근데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그 반대편이다.

아폴론적 시민은 잘못된 게 아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나는 함정에 하나 빠져 있었다. 책 몇 권 읽고 나면 대다수가 아닌 소수의 인격체가 굉장히 가치 있어 보이고, 반대로 대다수의 평범한 삶은 뭔가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함정. 규칙 지키고, 눈치 보고, 가정 지키는 사람들이 '가면 쓴 속물'로 보이는 함정.

당시엔 나도 그랬다. 스트릭랜드 부인이 남편 떠난 뒤에도 체면 지키려고 애쓰는 걸 화자가 비웃을 때 같이 비웃었다. 근데 세 번째 읽을 때는 그 사람이 가정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처세를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게 보였다.

니체 자신도 디오니소스만 찬양한 게 아니다. 『비극의 탄생』 결론은 그리스 비극이 위대한 이유가 두 힘의 결합에 있다는 거다. 디오니소스적인 내용이 아폴론적인 형식을 입을 때 예술이 된다. 한쪽만 있으면 하나는 차가운 조각이고 하나는 그냥 난장판이다. 그리고 진화론적으로 보면 아폴론적 시민의 삶, 그러니까 규칙 안에서 협력하고 가정 지키고 6펜스 줍는 삶이 사회 구성원들이 여태 살아남아 온 방식이다. 스트릭랜드 같은 사람이 백 명 중 백 명이었으면 인류는 진작 끝났다.

니체
니체

프리드리히 니체, 1875년경. 『비극의 탄생』 쓰고 3년 뒤. (퍼블릭 도메인, Wikimedia Commons)


5. 그래서 스트로브는 착한 사람인가

이번 모임에서 제일 뜨거웠던 게 스트로브였다. 해석이 다섯 갈래로 나왔다.

  • 착한 척 — 아내가 절대 안 된다는데 20페이지를 설득해서 스트릭랜드를 집에 들였다. 진짜 착한 사람이면 아내가 싫다는 걸 안 한다.

  • 평판 — 천재가 되고 싶었는데 못 됐으니까, '천재를 세상에 내놓은 사람'이라도 되고 싶었다.

  • 회피형 — 헤어지자는 말을 못 하고 "널 위해서"라고 하는 남자친구의 전형.

  • 예술 사랑 — 착한 척이 아니라 스트릭랜드 그림을 진심으로 사랑해서. 욕망의 생김새가 다를 뿐.

  • 모질지 못함 — 외모도 재능도 평범한 사람이 살아남으려고 익힌 생존 방식. 회피는 아니다, 편지도 쓰고 찾아가고 노력은 한다.

세 번 읽은 내 답은 이렇다. 스트로브는 착한 사람 맞다. 그리고 착한 아이 증후군도 맞다. 이 둘은 모순이 아니다.

스트로브는 분명히 착하다. 블란치를 사랑한 것도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모임에서 "스트로브는 블란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도 나왔는데 거기엔 동의 못 하겠다. 근데 스트로브가 하는 행동들이 스트로브의 본능이고 본성이냐고 물으면, 아니다. 착한 게 아니라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 속에 있는 거다. 문제가 생기면 문제를 보는 게 아니라 자기가 더 착해지는 쪽을 본다. 불륜 앞에서 "둘이 행복해라"가 나오는 건 이해심이 아니라 직면 회피다. 진짜 스트릭랜드의 예술이 좋았으면 스트릭랜드가 떠난다고 했을 때 같이 떠났을 거다. 굳이 "그럼 나는 원래 집으로 돌아갈래"라고 하는 거 보면, 이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1회독 땐 스트로브가 싫었고, 2회독 땐 '나는 착한 아이 증후군이 아니라 그냥 예의를 지키고 싶었던 거다'로 생각이 바뀌었고, 3회독 땐 다시 이렇게 돌아왔다. 둘 다였다고. 예의를 지키고 싶었던 것도 맞고, 버려질까 봐 그랬던 것도 맞다고.

인간실격의 요조 보면 중2병 시절의 내가 생각나듯, 스트로브 보면 20대 초반의 내가 생각난다. 이해가 가는 행동들이다. 다만 이제 거기 없을 뿐.


6. 모임에서 나온 질문들, 그리고 내 답

이번 발제 중 몇 개는 내 답을 적어 두고 싶다.

나의 '달'과 '6펜스'는 뭘까.
모르겠다. 사실 진짜 모르겠다. 모임에서 누가 "현상 유지만 해도 너무 행복한데 왜 6펜스는 달이면 안 되냐"고 했을 때 제일 크게 끄덕였다. 다만 모든 걸 버릴 정도로 뭔가에 몰두해 보는 경험은 한 번쯤 해 보고 싶긴 하다. 그 정도로 하고 싶은 게 없기도 하고, 그 정도로 할 만한 재능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평판이랑 보상을 다 포기하더라도 끝을 봐야 할 것 같은 일, 해야 할까.
한 멤버의 실제 고민이었다. 회사가 접으려던 사업을 직무까지 바꿔 가며 살려 냈는데 대표는 "원래 될 사업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이 사업은 회사 전체적인 비전에 맞지 않으니, 접고 다른걸 하자고 한다 하지만 멤버는 계속 그 사업을 하고 싶고 밤을 지새울 만큼 괴로운데도 끝을 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일단 끝을 보라는 입장이다. 그 회사에 남든 다른 회사로 가든, 그 선택을 안 했을 때 후회할 거라면 그 선택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6펜스의 삶, 속물적인 삶은 나쁜 걸까.
안 나쁘다. 모임에서 "속물적인 삶은 진화론적으로 올바른 삶이죠. 그래서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농담을 던졌는데, 앞부분이 진심이다. 속물이라기보단 그냥 '현실적인 삶'이고, 현실적인 삶은 진화론적으로 생존에 유리한 삶이다. 서머싯 몸이 화자 입으로 그 삶을 비웃는 건 작가 본인이 예술가라 고갱 쪽에 서 있어서지, 그게 정답이라서가 아니다.


7. 이 책이 바꾼 것

세 번 읽는 동안 연애 방식이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좀 달라졌다.

남 눈치 보는 게 많이 사라졌다. 내 안의 소리를 그대로 표현하려고 한다. 그렇다고 스트릭랜드처럼 직설적으로 말하는 게 좋다는 생각은 또 없다. 그것 또한 내 안의 소리일 거다. 그래서 '잘' 표현하려고 한다.

주말에 올림픽공원에 간다. 사람 많은 한가운데 혼자 캠핑의자 펴고 책을 읽는다. 예전 같으면 남들이 이상하게 볼까 봐 안 했을 거다. 지금은 그냥 한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지, 눈치 보여서 안 하는 게 아니다.

그게 전부다. 타히티에 가지도 않았고 회사를 때려치우지도 않았다. 근데 스트로브였던 사람이 화자 정도로는 옮겨 왔다. 남한테 무관심해진 게 아니라, 관심의 방향이 남에서 나한테로 돌아온 거다. 줏대가 생겼다고 해도 되고, 성장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이 책이 한 일은 그 정도고, 나한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8. 둘 다 가치 있는 일

달
달

달. 닿을 수 없는 이상. (NASA 루나 정찰 궤도선 촬영 모자이크, 퍼블릭 도메인, Wikimedia Commons)

1924년 6펜스 동전
1924년 6펜스 동전

1924년 영국 6펜스 동전 앞뒷면. 소설이 나오던 무렵 런던 사람들 주머니에 있던 바로 그 동전. 땅바닥의 현실. (사진: The Other 95%,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이 책을 제일 힘들어하는 친구한테 권한다면 이 말을 같이 붙이고 싶다.

스트릭랜드도, 스트로브도, 모두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누가 잘못되고 누가 잘했다는 건 없다. 닿을 수 없는 달에 계속 도전하는 것도, 땅바닥에 떨어진 6펜스를 찾으려고 열심히 땅을 쳐다보는 것도, 모두 가치 있는 일이다.

닿을 수 없는 달을 바라보는 낭만. 땅에 떨어진 6펜스를 찾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노력. 나는 둘 다 가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스트로브의 삶도, 이제는 조금 덜 미워할 수 있게 됐다.


2026년 10월 힛치 독서모임 /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민음사, 송무 옮김)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별도 표기가 없는 이미지는 퍼블릭 도메인. CC BY-SA 이미지는 각 캡션에 저작자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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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woo Yang

Written by Sangwoo Yang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웹 개발, 게임 개발, 그리고 AI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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